제 목 : 감동을 나누고자 퍼왔습니다 | 조회수 : 1500 |
작성자 : 껑순이 | 작성일 : 2009-03-20 |
어제의 감사와 회개의 감동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갈때, 밖에는 비가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저때문에 마음아프셔서 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 비를 맞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이라 생각하니,,, 그 눈물을 맞고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이상 주님을 울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 누가복음 15장 11~14절 이용규 선교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3가지 메세지를 주셨다고 합니다.
어제는 그중 한가지 메세지를 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구요, "거룩함" 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이 혼자 집에 있을 때 영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타짜 영화를 끝까지 집요하게 보시게 된 예화를 드시면서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거룩한 삶이 불가능함을 말씀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온전한 거룩을 이루었는가,
그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가?
거룩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표현인데
당신들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에 빠지셨었죠.
너희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기독교를 우리는 종교라고 말하기보다 "삶"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신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복(댓가/선물)도 주시지만
우리와 부자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신랑과 신부의 관계..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의 삶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한가지, 뜨끔한 질문,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느냐 라는..
하나님 자신인가, 주시는 복과 천국에 가기 위해서냐...
만약에 찬란한 천국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낮고 낮은 곳에 계셔도 그곳을 가고 싶어 할거냐..
내가, 아버지는 내 삶을 간섭하는 존재, 구속하는 존재로 여기고 오직 재산에만 관심을 가졌던 탕자와 같지 않은지.
살아계신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한 둘째 아들은 마땅히 길거리에서 돌로 쳐서 죽여도 되는 그런 죄인이었다.
우리가 무너뜨릴 여리고는 삼성의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자신이 아닌가,
우리의 자아가 아닌가
세상의 가치는 위를 향하는 삶이지만 하나님의 가치는 아래를 향하는 삶이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의 특징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 하나님의 가치가 실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가? 사랑할 힘을 구하라. 우리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시시때때로 귀찮아하면서도, 그리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받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
나 한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다.
철저히 회개해야한다. 탕자가 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 품에 안겨라.
□ 말씀 : 이사야서 55:4~9
□ 제목 : < 나의 생각과 너무 다른 하나님 >
□ 내용요약 :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지 않으면 나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 "거룩"은 예배나 집회때 한번 눈물을 흘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예배나 집회가 끝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온전한"회개를 통해서 "나"라는 밭이 "완전히" 갈아엎어지지 않으면 온전한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수영을 하다가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을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발버둥을 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찾으며 평온해집니까?
"나"를 온전히 비워야 죽음이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아주 뜻밖의 사건"을 통해서 나와의 관계를 점검하십니다.
"나"라는 존재가 가진 원칙(고집)때문에, 하나님은 참 불편하실 때가 많습니다..
내가(이선교사님) 하버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나름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영어공부하고 했겠습니까?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모든 것을 우선순위에 근거하여 생활하였는데, 기도중 한번도 생각지도 않은 요청을 하실때,, (예컨대, 내가 가장 바빠서 다른 곳에 가서는 안 될때, 캐나다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실때)
나는 하나님께 "주님, 이건 제 생각하고(우선순위) 너무 달라서 좀 곤란한 요청이시데요"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에 불편하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엘리트로 삼성에서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의 고집이나 상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것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기에 불편하게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럼 왜그랬습니까? "내가" 불편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여러분의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당신은 여전히 "가짜"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우리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버려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를 너무나 많이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그럼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내가 "안 죽 었 기" 때문이다. "덜 죽 었 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죽고도, 내가 덜죽고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고, 나의 "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죽은 나"를 가지고 열심히 쌓는 "모든 것"은 "바벨탑"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문제와 연관이 됩니다.
복음은 나를 죽이고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을 온전히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그 복음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를 연민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기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연민이 너무크지 않습니까?
아내가 공부할 때, 등록금때문에 매일 하나님께 등록금달라고 매달려 기도하고 귀가하던 아내가,
"여보, 우리 양가집안이 우리에게 등록금을 못 대줄 정도로 부유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직 주님께만 매달릴 수있잖아요"라고 얘기하였을때,
돈이 없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은 돈이 없는 부모님을 두었다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지만,,,싫지만,,,
결국 순종하고 그 자리에 있으면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오히려 높여주십니다.
이시간, 완전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단을 지금 하시기를 원합니다.
온전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이상 불편하게 하지 맙시다.
Title : 찬양축제 3일차 말씀
선교지의 부흥은 선교사의 회개 뒤에 따라온다.
한국교회의 부흥도 선교사들의 회개(한국사람들보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고백과 함께 용서를 구함)뒤에 왔고 인도네시아 교회의 부흥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삼성에, 우리 가정에, 또 어느 모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고 고백하는 우리에게 그러한 회개가 있는가.
하나님의 군사를 뽑는 방식은 계속 걸러내시는 것이다.
기드온의 군사 300명을 선택하신 방법과 같이.
오늘도 동일하게 내 자아에 대해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검을 대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되 철저히, 돌위에 돌 하나라도 남김없이 모두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
오늘 야곱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창32:21~30)
야곱이 얍복강을 넘어 혼자 남아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건이다.야곱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야곱은 복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축복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축복을 받으면 행복해질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바로 왕 앞에선 노인 야곱은 130년간 험한 세월을 살았음을 고백해야했다.
둘째 야곱은 축복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래서 에서의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인생이 펼쳐진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약삭빠른 외삼촌에게 가게 되고 외삼촌에게 속아서 부인을 얻기 위해 수년간을 애쓰게 된다.
에서와 외삼촌 라반의 사이가 야곱의 광야생활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방법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축복하기로 결정하셨음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 말씀하셨고
에서를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은 정말 불행하고 두려운 일이다.
내 삶에 고난이 있다면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축복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야곱의 신앙수준은 어떠했는가? 오늘 우리와 비교해보자.
야곱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에서를 향해 가고 있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순종도 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삶에 개입하심을 알았다.
당신은 야곱의 현재 수준대비 어느 정도인가.
하나님께서 야곱을 쓰시기 위해서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였다. 에서와의 관계. 그것을 대면하라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불편한 관계를 해결하기 원하신다.
그들은 내 성장의 단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 중에 붙여주시는 사람들이다.
내가 밉게 보는 사람의 행동은 모두 내게 불리하게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야곱의 행동을 보자.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위해 내려가는 길은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갔던 가나안을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드리며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또 그것도 불안해서 가족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한 뒤, 자신은 또 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자신의 계획과 뜻을 의지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고 두렵다.
이런 야곱의 행동은 아마도 최후의 순간에 자신만은 지키기 위한 계획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극도로 이기적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내 우선순위가 드러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갈수록 좋아져야한다. 생명은 갈수록 성장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된다.
가정생활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영된다.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우리...
정말 최후의 순간에는 홀로 남게 된다. 홀로한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동안 이것 저것을 얻기 위해 분주히 살아왔는데 이제 가족을 앞세우고 홀로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있는 자신...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실제로 씨름을 하셨다. 아마 그러면서 에서를 대면하러 나가라 하시면 저는 못합니다,
나가라, 못합니다 하며 긴 실갱이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포기하신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려오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안다.
하지만 내 목숨, 내 자아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엉치뼈를 건드리신다.
야곱은 유목민이었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력인데, 바로 두 다리가 그들이 의지할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동성이 없다. 자 야곱아 이제 어떻게 할거니? 라고 물으신다.오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장 의지하던 그것을 건드리시기 원하신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건드리시기 원하신다.
최후까지 지키고 싶은 그것을 다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내가 하나님자녀가 아니라면 건드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서 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것,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가 꼭꼭 숨겨왔던 그것을 건드리시며, 자 이제 어떻게 할거니 라고 물으신다.
다리가 건드려진 야곱은 하나님읠 붙잡고 축복해달라고 요구하는데 이름을 물어보신다.
네 존재가 무엇이냐,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질문이시다.
야곱의 현재 수준으로는 사용할 수 없으셨던 하나님.
속이는 사람입니다. 내 방식, 내 꾀로 내길을 내가 개척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믿고 살고 경쟁하며 속이며 살았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시는 하나님. 사람은 사람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바꾸신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말로 바뀌지 않는다.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붙잡으면 내 인생이 바뀐다.
거듭난 현장에는 반드시 회개의 눈물이 있다. 가치관, 삶의 지향점이 송두리째 바뀐다.
야곱이 그렇게 바뀌었다. 에서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본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를 끔찍히 사랑했던 삶.
내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불편해 했던 곳이 어디인가.
오늘 우리 가정들이 많은 공격을 당하고 있다.
성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을 이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
능력없는 교인이란 것에 대한 부끄러움.
하나님의 거룩이 부담스러웠던 것..
자녀들을 세상의 가치로 양육했던 것..
누가와 무엇을 위해 바쁜가..
또 하나의 야곱을 살리시기 위해서 아픔을 들쳐내기 원하신다.
나는 정말 십자가를 사랑하는가. 나보다 십자가가 앞에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서 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것,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가 꼭꼭 숨겨왔던 그것을 건드리시며, 자 이제 어떻게 할거니 라고 물으신다
회개를 촉구하신다. 생각하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거룩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지향할 곳은 하나님의 거룩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 피곤하고 바쁘고 위로받을 곳, 스트레스 풀 곳이 필요해요 - 설득할 수 없다. 거룩하길 원하신다.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거룩해져야 한다.
철저히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한 번 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서 그치면 안된다.
이 감동이 오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
내가 가진 것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이 무엇인가..
미천한 나라도 내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너희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 저는 야곱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 배우자에게 실망했는가..
내 가까운 가족조차 사랑할 수 없는 나.
주님의 사랑이 내게 계시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 나..
변화되지 않는 나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복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만이 내 복이십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불편해했습니다.
내 부끄럼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를 건드려주세요, 저를 바꿔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죄의 영역을 다루기 원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했으면서 용서했던 척한 것을 회개합니다.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서 대면하라고 하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허락하소서.
음란의 죄-생각으로 마음으로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이것을 가진 한 이스라엘로 사용할 수 없다.
나만이 알고 있는 죄를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하게 주님을 대면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모두 제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거대한 세상앞에서 주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안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주소서, 주님의 대로가 구축되게 하소서.
주님의 거룩을 사모하게 하소서, 나는 죽고 오직 내안에 십자가가 살게,
주님만이 살게 하소서.
나를 십자가로 이끄소서. 십자가로 이끄소서. 변화시켜주소서, 회복시켜주소서.
내 힘으로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야곱이 여기 있습니다. 찾아와 주세요.
남김없이 드러내고 주님의 거룩을 덧입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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