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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 " (요 13:36-38, 14:1-7)| 조회수 : 1741
  작성자 : Joshua 작성일 : 2010-08-04

*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  : 요 13:36-38, 14:1-7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사도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란 표현과 함께 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의 핵심에 반석에서 떨어진 또 하나의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사도 "베드로"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자(者) 즉,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에 대한 모든 설명을 함축하고 있다.

 

서론 격인 그 요한 서신의 시작인 1장에 베드로가 등장하고 결론적인 21장에 역시 사도 베드로가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이 말을 거는 대상이 항상 사도 베드로 였고, 나머지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문점을 예수님께 묻고 있을 뿐이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후사가 되어 사람의 영을 살리는 일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양들의

문지기가 되어 각각의 문제들을 찾아 필요를 따라 채워주고 먹여주는 선한 목자를 예수님께 배워

다시 예수님과 같이 영을 살려야 할 일을 하는 믿는 자들의 사명이 "베드로"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13장 전체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묻고 자신의 몸이라도 죽여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를 수 없는 길이지만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을 베드로의 목숨 값으로 설명하고 있다.

 

14장 4절의 원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나도 알고 그 길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예수님도 모르는데 그 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고 반문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에 죽기 전인 베드로적인 믿음을 죽이는 길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 길만이 진리의 길이며 영의 생명을 얻는 길인 것이다.

 

7절에서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라는 말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삶에서 찾게

되는 신앙인의 삶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길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사람 앞에 보여주는 길이다.

 

또한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의 다음 문장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함 이신데 그 필수 요건인 십자가에 죽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은 자신을 죽이고자 했고, 또 하나님을 우상으로 믿으면서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부르고, 사람들과 싸워 하나님의 일군들과 사자들과의 싸움을 싸우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하며 하나님이 보낸 일군들을 판단하는 즉 수시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곧바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통해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즐거움으로 따라오게 하신다. (빌 2:5-8)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5-8)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 그 누구라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뜻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지금 교회의 모습에서 교회는 교회와, 교단은 교단과, 종단은 종단과, 교인들은 교인과, 교인들이

세상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으면서 오직 자기들만 고고한 척 한다.

 

베드로의 뜻과 같이 말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의 지식 안에 있는 말들을 전하는 것으로 이 방법에는 타인의 생각이나 이념, 신념

개념은 전혀 무시된다.
그래서 괴리감이나 이질감, 또는 열등감이나 죄의식, 감정이나 자존심들이 서로에게 존재하여

서로 다툼이 생긴다.

 

둘째는 자신이 깨달은 성경 말씀을 따라 자기 자신이 다 지키고 행한 후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타인이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면서 물을 때 자신의 말을 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서로의 의견이 일맥상통하는 가운데에서 하나의 목적이 있어 절대로 다툼이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처음 베드로는 첫째의 방법과 같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지식

전달의 방법이고, 십자가에 죽은 후의 베드로의 모습은 자신의 사상이나 방법을 물으러 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감동과 함께 하나님의 사상을 전하는 쌍방교류의 방법이었다.

 

우리들을 돌아보자!!!
남들보고 틀렸다고 말하면서 고치라고 요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내 모습을 인정하며 우리의 삶의 방법을 묻는 자들에게 나 자신이 변화 받는 길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복음의 방법을 따라 내가 변한 것을 전달하여 공감하게 하는 베드로 적인 가르침이 있는가?

 

"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살 때)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 (벧후 1:13-15)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법이 옳다고 하거나,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우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살후 2:4)

 

“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 (살후 2:4)

 

그래서 세상 사람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미련함, 죄를 말하게 되면 긍정보다는

울화가 먼저 나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여 우월하게 다른 것이 아닌 비교우위를 가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 어느 것이라도 그 이론의 절대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본바탕이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육은 그 어떤 것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비교해 봐도 절대 비교 우위를

자랑할 수 없는 교육의 법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 교육법에는 자신 스스로도 살아가며 세상과 같은 방법을 가지고 귀신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더 큰 우주의 권력자를 찾아 이제 줄 한 번 잘 서야 된다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줄을 잘 서서 있는 사람보다 주인의 의향대로 그 줄을 이끌 사람들이 만들어지길

원한다. (수동적 신앙)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를 바라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얻어먹는 자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 신앙)
이제 우리는 내가 먼저 하나님께 죽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안에는 밖으로 나가는 베드로도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따르게 하는 내면의 베드로도 필요하다.

 

아니 밖으로 나가는 베드로는 필요 없다고 하여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게 하는

내면의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꼭, 반드시 필요하며 자신의 내면에 이 베드로의 출현 또는 변화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사람에게도 지식을 채워주어 말로만 떠들게 하는 말이 있고, 지식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면서

마음을 변화 받기 위한 하나님의 감동이 있는 심령을 울리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제 마음의 성품이 바뀌어 하나님의 집을 하늘로부터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만 채우는 지식으로만 받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바꿔주시는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영적인 베드로를

하나님께 바라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 져도 내 마음에 천국이 임하여 내 마음이 천국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 믿음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남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되고, 나의 그 온전함을 보고 인정하여 그 사상을 배우려고 오는 남들에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전하고 배우는 귀한 신앙의 일들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할 베드로는 나를 위한 신앙의 길을 온전히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아가페의 사랑 방법을 따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나 행동이나 말이나 그 어느 것에서도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없고 오직 마음에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한 공통의 목적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신앙의 참 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과정에서 있던 일들이 모범적 길이며 자신의 것을 전혀 피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만을 따라가는 그 길 안에서 자신을 죽이는 일 즉 인본주의 적인 사도 베드로의 세 번 부인했던 종류를 죄라고 인정하고 부인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이들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진정으로 고백하고 회개하여 성경적으로 6의 숫자인

세상이 가진 마음에 있는 성품의 죄를 모두 떨쳐 버려야 한다. (666의 뜻이 포함됨)
그러할 때 안식의 때인 7의 수처럼 이 세상에서도 안식을 누리는 기적의 역사가 각각의

성도들에게 있게 되는 하나님의 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디! 아멘! 




출처- 깨어있는 집               글쓴이- 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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